지 상 설 교

살든지 죽든지 -- 신우인 목사님

91moses 2011. 10. 23. 16:37

       살든지 죽든지               < 신 우인 목사>

 

한 농부가 황폐해진 농장을 사들였습니다.
사람 키만큼 자란 잡초와 낡고 헐어버린 창고, 돌멩이로 가득한 텃밭.
그러나 농부는 열심히 농장을 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땀 흘려 일하고 있는 농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멋진 농장을 가꾸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목사님이 다시 농장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농장은 말끔하게 치워지고
많은 곡식과 가축들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단하군요! 역시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감탄하는 목사님의 말에 농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 이걸 생각해 보세요. 전에 하나님 혼자 농장을 가꾸실 때는 어땠는지?”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두 가지입니다.
‘에레츠’와 ‘아다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숱한 언어들 중에 히브리어를 택하여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어휘가 대단히 빈약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한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다를 의미하는 얌yam이라는 단어는 호수뿐만 아니라 그릇에 담긴 물까지 지칭합니다.
그런데 ‘땅’은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은 ‘에레츠’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드실 때 사용한 땅(흙)은 ‘아다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니”라고 할 때, “하나님이 ‘아다마’로 ‘아담’을
지으시니”입니다.
‘아다마’로 만드셔서 ‘아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레츠와 아다마는 질이 다른 땅이 아닙니다.

아직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의 천지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레츠)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 2:5-6)

곧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흙(아다마)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 땅(에레츠)을 아담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땅(에레츠)은 아담이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는 ‘아다마’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잘 가꾸면 사랑과 생명과 기쁨이 솟아나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어여삐 여겨 저절로 에덴동산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올바로 생각하고 힘써 가꿔야 내 아다마가 에덴동산이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 저는 송곳 꽂을 땅도 없어 가꾸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요.”라고 질문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다마는 단순한 땅이나 토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의 전 영역을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아다마는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나를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내가 아무리 낮고 척박한 상황에서 출발했어도 풍성한
열매를 거둡니다.
조건은 단 하나,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경영해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자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창 3:17-19)

땅은 정직하다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히 농사를 짓는데도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농사는 이미 ‘도박’이 되고 ‘투기’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배추 풍년이 되어도 배추 값이 폭락하면 사람들은 화를 내고 배추밭을 갈아엎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경제 논리로 아다마를 경작하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도 그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은혜를 모를 뿐만 아니라 언제나 부족하고 화까지 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 숫자가 얼마나 늘었는가, 헌금 액수가 얼마냐가 평가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나 목회마저도 ‘숫자 놀음’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숫자에 얽매어 사는 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다마’에는 겉으로는 화려할지 몰라도 속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만 무성할 뿐입니다.

며칠 전에 한 집사님으로부터, 사랑의 물품을 전해 주는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어린 아이를 홀로 키우는 젊은 엄마는 힘든 삶에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져서 삶의 의욕마저 잃고 약으로 간신히 지탱하며 살아갑니다.
그 집사님은 진심으로 그 엄마를 불쌍히 여겼고, 친구가 되어 이야기도 들어주고 설교 CD도 가져다주며 행여 마음이 다칠까 조심스레 도와주었습니다.
몇 달이나 지났을까, 지난달 만났을 때 표정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삶의 희망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교회까지 왔습니다.
황폐한 곳에서 조그맣지만 파란 싹이 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게 맡겨진 작은 일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하기로 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하며,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전지전능하신 능력은
내 아다마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경영하려는 사람들만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경영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 1:12)

현재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 감옥생활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을 지키는 시위대와 간수들과 동료 죄수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 전파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함께 수감된 죄수들은 물론, 군인들과 간수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옥 바깥의 그리스도인들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여기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중략)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1:15-17)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지역에 서로 사이가 나쁜 선교사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선교사가 어려운 중에도 열심히 사역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선교사는 더욱 열심히 사역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저런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의 심정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이로서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일을 통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엇을 알게 하고 싶은 것일까요?

빌립보 교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사도 바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예수님만 존귀하게 된다면, 모든 재능과 특권을 배설물로 여기며 사형장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45세의 이서진 씨가 소설 “강변에 서다”로 올해 심훈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서진 씨는 전신마비 장애인입니다.
25년 전, 20세 꽃다운 나이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며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혹여 딸이 들을까 소리 죽여 밤새 우시는 어머니를 보고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시작한 것이 독서였습니다.
입원해 있던 2년 반 동안 하루 15시간씩 죽기 살기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 이후 10년을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바깥 세상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PC통신입니다.

그녀의 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이 깊을 대로 깊어진 터, 그녀의 글을 읽고 한 남자가 관심을 보였고, 만나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전신 마비 장애인임을 밝히며 거절했습니다.
그 남자는 끈질겼습니다.
영화 같은 사랑 끝에 이현수 씨와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격려에 힘입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덧 전업 작가로 신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입에 문 나무 막대로 글을 씁니다.

이서진 씨 안에서 문학이 존귀하게 되었고, 문학 안에서 이서진 씨가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안에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내 생각, 내 바램, 내 소원은 다 버리고, 그 대신 예수님의 생각과 소원이 곧 내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 성장이 우선순위가 될 수 없습니다.
최우선 순위는 내가 변화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는 것입니다.
상황에 짓눌려 주저앉는 우리,
욕심과 비본질에 생명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간구를 들으시기를, 그래서 내 안에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내가 존귀하게 되기를,
내가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저절로 임하기 시작합니다.

21세기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은 놀고 먹는 곳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도 노동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 2:19)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한 일은 각 사물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이름 짓는 일은 아담의 몫이었습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저 입으로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름을 더럽혔다고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거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정하고 돌보고 아름답게 만드는, 운명을 결정하는 총체적인 행위입니다.
즉, 아다마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자녀는 내 배 아파 난 내 새끼’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 아이의 운명은 어두움으로
들어가도록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최고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돈이나 권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이 우상이 되어 그에 의해서 반드시 파괴되어 버립니다.

‘나는 비빌 언덕도 없는 루저야.’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는 순간,
그는 이미 끝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힘을 내어 일어선다면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나기 시작하며 그분에 의해서 밑바닥 인생도 반드시 살아납니다.

사도 바울의 직업은 이방인의 사도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였다는 것이고,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일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처럼 맡은 일에 살든지 죽든지 충실하라는 것이며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8-9)

자신의 맡은 일과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것은 곧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건강한 땀으로 성실한 삶을 살기로 합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반드시 쉴만한 물가, 생명과 기쁨이 샘솟는 에덴동산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