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동원대 부길만(광 고편집과. 사진) 교수는 “언더우드의 ‘찬양가’를 연구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단순히 종교사적 의미뿐 아니라 문학·예술 등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며, ‘놀랍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최근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언더우드의 찬양가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출판 분야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1894년 ‘예수성교회당’에서 간행된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했고 판매 보급은 서울 삼문출판사가 담당 했다.
악보는 영국 79곡, 미국 23곡, 한국창작 7곡, 시편 1곡, 미상 6곡, 주기도문 1곡 등 총 117편의 4 성부가 표시돼 있다.
“찬송은 기독교 예배에서 필수 요소입니다. 당시 찬송가는 영어나 중국어로 부르거나 한문 음역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가령 ‘主耶蘇愛我’를 ‘주야소애아’라는 식으로 불렀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 한글로 찬송가를 편찬하고 가르치며 한글 보급에도 힘썼던 것입니다.”
또 부 교수는 1930년대 일부 언론사 차원에서 한글운동을 시작했지만 선교사들은 그보다 앞서 1880 ∼90년대 한글 보급에 나섰다고 평가했다.
“선교사들은 국가의 허가를 받고 왔기 때문에 정부 관료나 지식인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글성서와 찬송가를 들고 민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어요. 이는 낮은 자를 위한 종교를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또 문맹을 없애 한국 사회를 바꾸기 위함이었습니다.”
문학적 측면에서도, "찬양가에 수록된 찬송은 18∼19세기 영미 문학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가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 많다. 이는 찬송을 통해 서구 문학이 한국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됐다. 오선 악보로 서양 음악을 보급하여 현대 한국 음악의 발달에도 기여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 의미 또한 크다." 부 교수는 한국인 작사 찬송이 7곡이나 들어간 점도 기독교 토착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93장 ‘어렵고 어려우나 우리 쥬가 구땪네’는 최초의 장로인 백홍준이 지은 것이다. 그밖에 6곡은 작사자 미상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출판과 역사를 전공한 부 교수는 “기독교는 종교나 교회사적 의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덜 알려져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번 찬양가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기독교가 얼마나 우리의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는 “출판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다른 분야 전문가들이 짚어내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 찬양가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어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