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1호
주기도문에서 숨은 비밀 찾기 1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조건 제시가 아니다. 갓난아기들이 태어나 처음부터 자기 부모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가 계속적으로 아기를 돌보며 부모임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눈과 눈이 마주치는 사건을 거듭하는 것뿐이다.
이로 인해 자신의 부모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아는 차원으로 돌입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 알아져 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 ‘앎’이 ‘삶’으로 전환되어져야 하는데 ‘앎’과 ‘삶’이 서로 따로 떨어져 역할을 하는 것이 문제다. 서로 하나가 되어 이뤄져야만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누린다.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다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문장은 내 안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하나가 되어 나와 함께 함에 따라 “하늘들”이 이뤄짐을 깨달으면 “하늘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 “우리”라는 차원에서 아버지를 불러내는 것이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본원칙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다는 차원에서 바로 “이름”이 이뤄지는 것인데 “이름”이라는 단어에 토 오노마(to. o;noma,)라는 단어는 기노스코(ginw,skw) ‘알다, 허락하다, 알게 되다, 느끼다, 인식하다, 알아차리다, 분석하다, 말할 수 있다, 확신하다, 이해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다양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다”(요 17:3)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니라.”(요 5:20)
주님을 안다는 차원이 그 존재와의 관계나 인식 차원에서 안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복음서에도 귀신이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 절한다고 해서 예수를 아는 차원일까? 아니면 야고보서 2:20에 “귀신도 예수를 믿고 떤다.”고 까지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알고 믿고 있는지에 대해 어떠한 자부심이나 긍지에서 헤매지 않았으면 한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사이나 부부 사이에도 문제가 생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신학교를 다니며 기가 막힌 지식을 얻고 기도원을 찾아 신비한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에 대해서 안다는 차원으로 돌입될까?
이러한 앎은 나의 노력이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전혀 아님을 인식해야 되며 온전히 하나님께서 “깨달음”이란 차원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셔야만 깨달아지는 것이다. 마 16장에 베드로가 전무후무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17절에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한 말씀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위대한 신앙고백이나 행위가 내가 잘 나서 아니면 내 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철저하게 깨닫고 내 안에 존재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신앙고백이며 행위의 결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전에 언급한 것처럼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회개를 의미하는 차원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내 안에 주님의 존재와 하나가 됨에 따라 “이름”(쉠 ~ve)이란 존재가 형성된 것이며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어 단어로 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며 사역하는 존재가 바로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 에서의 발 뒷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나왔다고 해서 발꿈치를 잡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야곱의 이름은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올바른 결실을 맺기를 소망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에서가 나오기 전에 야곱의 발이 먼저 나왔다가 산파가 다시 집어넣은 후 에서가 나온 사건의 내용은 영어성경이나 원어성경에서는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권을 가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갖고 사용하는 이름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잘 지어야 하며 올바르게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이름에 대한 의미와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 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되도록 만들어 주신 섭리와 은총,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구속사에서 견주어 볼 때 “마땅히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는 의미로 표현되어 한다. 그런데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부정한 입으로 표현한다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전혀 아닌데 함부로 남발하고 있다.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된 상태가 된 후에 “과거 옛 사람이었던 나를 창세전에 새 사람으로 다시 되돌려 놔 주시기 위하여 내 안에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성탄절의 은혜를 입게 하셨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죄의 상태에서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으시고 삼일동안 함께 장사지내주시고 함께 부활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셔서 우리가 거룩하게 만들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부르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기 위해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용해야 하는 이름이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사울은 바울로 바요나 시몬에서 베드로로 이름이 바뀐 것은 그들의 사역이 달라졌으며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이름은 반드시 그 이름값을 해야만 된다. 이름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 이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리브가라는 여인의 이름은 아름다움을 붙들어 매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하나로 되기 위해 동침하며(관계성을 의미)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과 연결된 모든 부분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이름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와 내용을 담고 있다면 “하나님”라는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어느 것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사용해야 된다고 문법적으로 아니면 역사적으로 따지는 분들은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름은 단순히 불러지기 위해 사용되는 목적이 아니라 그 이름을 통해 전달하려는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이름들은 너무나 많은 종류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이름에 대한 의미와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다.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시려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뜻과 정신(계시)을 전달하시려고 사용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사상으로 양육되어지며 자신에게 적용되기 위해 존재되어졌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상으로 양육되어지고 적용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개방하는 상태가 바로 아브라함이 해야 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내가 그 분들과 한 몸이 되어 그 분들이 의도하시는 삶을 내가 살아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요, 기도이며, 봉사와 헌신인 것이다. 착하게 살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과 한 몸으로 살아가면서 그 안에 존재하시는 의미에 따라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내 이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났다는 것인데 과거 옛 사람인 내가 아닌 창세전에 존재했던 내가 나를 인식하게 되고 존재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새 사람인 것이다. 야곱이 얍복 강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얻은 이름이 바로 거듭남에 의해 부여되어지는 이스라엘(하나님을 올바르게 증명하는 존재)이란 이름인 것이다.
단순히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부르거나 사용하는 의미와 달리 주님과 연합하여 얻어진 결과로 살아가는 열매로 사용되는 이름을 의미한다. 주님과 한 몸이 된 거룩한 이름을 이루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
'지혜롭게 공부하는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경 바로 가기 (0) | 2010.01.10 |
---|---|
다섯 손가락 기도 (0) | 2009.12.16 |
마태복음 1장에 숨은 비밀 찾기 (0) | 2009.10.11 |
성경 퍼즐 (0) | 2009.10.04 |
성지순례 -- 예루살렘 (0) | 2009.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