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인물 탐구
1. 김익두 목사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에서 김응선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농부였기에 아들을 일찍 서당에 보내어 한학을 공부하게 하였고 16세에 과거에 응시시켰다. 그러나 김익두는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다.
그는 고향에서 다시 공부를 계속하지 않고 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때부터 술을 마시고 주먹을 휘두르게 되었다. 놀음에까지 손을 대고 깡패로 전락하였다. 김익두의 이름은 깡패로 널리 알려졌고, 장날이면 길 어귀에서 누구나 만나는 대로 시비를 걸어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해 손을 벌렸다. 안악군 일대 사람들은 김익두를 만날까 장날이 되면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러한 인간 쓰레기같은 김익두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다. 1900년 어느날, 김익두가 거리를 지나는데 전도지를 주며 전도하는 여자 선교사를 만났다. 선교사는 김익두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하였다. 김익두는 전도를 받아 선교사가 보는 앞에서 코를 풀어 길바닥에 던졌다. 그때 여자 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고 말했다. 이 말이 김익두의 가슴에 박혔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김익두를 괴롭혔다.
그 이후 개운치 못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결국 교회를 찾게 되었다. 김익두는 스왈렌(William Swallen) 선교사의 집회에서 구원 교리를 깨닫게 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1901년 7월,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기도와 성경 탐독 생활을 계속하였다. 김익두는 은혜를 받고나서 뜨거운 가슴으로 전도일을 시작하였다. 쪽복음과 전도지를 갖고 동네마다 다니며 전도하였다.
김익두는 1903년 재령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스왈렌 선교사는 김익두 전도사를 지도해 주며, 신천, 서북 교회 전도사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이 곳에서 김익두는 많은 핍박을 받았고,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1907년 3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1년, 김익두는 평양 신학교의 제3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해 황해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신천 서북 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백명이 넘는 교세가 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이적 기사를 읽다가 “주님께서 지금도 병 고치는 능력이 필요하다면 이 은사를 나에게도 주시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고 거리에 나가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하였지만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의 믿음 없는 연고임을 알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1개월 동안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그에게 이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익두 목사는 가는 곳마다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었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20년, 김익두 목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9회 총회에서 총회장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한 교회를 계속 시무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집회 요청이 많아 교회를 사면하고, 부흥사의 길에 나섰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크게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776회 부흥회를 인도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부흥사 이성봉 목사도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는 1936년, 서울 남대문 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였고, 1942년 신사참배 반대로 종로 결찰서에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다. 출감 후 함구령이 내려 황해도 은울군 장연면 중흥에서 과수원을 하며 지냈다.
해방이 되어 다시 목회의 길을 나섰지만 공산당의 간악한 폭정은 그에게 환난을 주었다. 강양욱이 찾아와 여러 차례 공산당을 지지하고 가입하여 주기를 요청하였지만 거절하고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양욱은 집요하게 목회자들을 선동하였다. 많은 목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가 무참히 끌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들을 유지하다가 기회가 오면 탈퇴하자는 뜻에서 가입하는 목사들도 있었다. 김익두목사는 이북에 남아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끝까지 교회를 사수해야 한다는 뜻에서 “기독교 연맹”에 가입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1950년 10월 14일 국군과 유엔군이 신천 지방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나돌자 인민군들은 후퇴하면서 반동이나 불순분자를 처단하고 떠나갔다. 이날 새벽, 김목사는 국군이 온다는 기쁨과 감격의 설레임 속에서 교회당 종줄을 잡아 당겼다. 30분 가까운 시간에 종을 울렸다. 교인들은 50여명이나 모여 들었다. 새벽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이때 인민군이 들이닥쳐 김목사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전도사와 장로가 막아섰지만 총성은 교회당 안에 울려 퍼졌다. 김목사는 쓰러졌고, 동시에 5명의 순교자 시체가 교회당 마루에 눕게 되었다.
1950년 11월 29일, 김목사의 시체는 안악으로 가는 고개 넘어 산중턱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이 낳은 세계적 부흥사 김익두 목사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영향은 이땅 방방 곳곳에 깊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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