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인물 탐구
1. 이기풍[李基豊, 1865.12.23~1942.6.20]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이자 순교자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중일전쟁 후 전도인 전군보(田君甫)의 전도로 결신(決信)을 하고, 1894년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S.A.마펫 선교사 등의 전도를 방해하고 핍박한 죄를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다. 1898년부터 매서인(賣書人) 자격으로 함경도 일대에서 성경 반포 ·전도사업을 하다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장로교단의 효시인 독로회(獨老會)가 조직되면서,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자신의 입장과 비슷했던 사도 바울로의 회심(回心) 사건에 관심이 컸던 그는 남다른 선교열이 있어 제주 전도에 적임자라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1919년 광주북문내교회 초대목사가 된 이후에도 제주선교에는 늘 관심을 기울였다. 1920년 전라도 장로회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지도자들과 연대, 반대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2. 길선주[吉善宙, 1869~1935.11]
장로교회 목사이자 교육가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펼쳤고 숭실학교(崇實學校)·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이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목회(牧會)활동과 구국운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復興師)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에 죽었다.
3. 주기철[朱基徹, 1897.11.25~1944.4.21]
3.1운동에 참가한 후 1926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산, 마산, 평양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38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복역 중 옥사하였다.
호는 소양(蘇羊)이다. 아명은 기복(基福)이다. 경남 창원(昌原) 출생이다. 1916년 평북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연희전문(延禧專門)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그 후 웅천(熊川)에서 남학회(南學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였으며, 3·1운동에 참가한 후 1926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 목사, 마산 문창(文昌) 교회목사를 거쳐 1936년 평양 산정현(山亭峴) 교회목사가 된 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38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 손양원[孫良源, 1902.6.3~1950.9.28]
장로교 목사. 소록도의 나병환자들 수용소인 애양원(愛養園) 교회에서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하였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감복시켰다.
호는 산돌이다. 경남 함안(咸安) 출생이다. 1910년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7년 선교사 맹호은(孟晧恩)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3년 일본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9년 경남성경학교(慶南聖經學校)를 졸업, 1934년까지 밀양·울산·부산 등지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다시 신학을 지망,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소록도(小鹿島)의 나병환자들의 수용소인 애양원(愛養園) 교회에 부임하여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강점하인 1940년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다가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는데, 8·15광복으로 출옥, 1946년에 목사가 되었다. 다시 애양원 교회를 지원하여 시무하던 중 1948년 여수·순천사건으로 동인(東印)·동신(東信) 두 아들을 폭도들에 의해 잃었으나, 사태 진압 후 가해자들의 구명(救命)을 탄원하여 원수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감복시켰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의 일대기인 《사랑의 원자탄》은 영화화까지 되었다. 저서에 《산돌 손양원 목사 설교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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