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 : 54-71 배신과 조롱과 의심을 넘어 20250416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누가복음 22 : 54-71 배신과 조롱과 의심을 넘어 20250416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곧 주의 말씀 곧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희롱 당하시는 예수님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신문 받으시는 예수님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 베드로의 부인이 있은 후,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희롱 당하시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신문을 받으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 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동하십니다.
👁 61-62절) 시선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 후 닭이 울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할 법도 하지만, 예수님의 눈빛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 바라보신(요 1:42) 그대로였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모습은 달라졌어도,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67b-71절) 소망으로 절망을 이기십니다.
피고인의 신분으로 법정에 계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을 확신합니다. 현재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장차 올 영광을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롬 8:18). 우리도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 받았습니다. 장래의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견디고 이겨야 할 오늘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54-55절) 물리적 거리가 신앙적 거리의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잡히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갈 뿐입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도 예수님의 곁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앉았습니다. 잡히신 예수님을 보니 두려움과 의심이 피어 올랐고, 그것이 예수님과의 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생활이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마음도 멀어졌다는 뜻이 아닐까요?
56-60절)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칭찬받았습니다(마 16:16).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모른다’며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상황에 따라 고백과 부인을 번복하는 것을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우리 신앙고백의 대상이시며, 바른 신앙고백을 위해 부인되어야 할 것은 나 자신입니다(9:23). 나는 상황에 따라 고백의 대상과 부인의 대상을 혼동하지 않습니까?
63-67a절) 로마 군병들은 ‘선지자 노룻 하라’며 예수님께 능력을 구했고,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며 증명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이나, 모르는 이방인이나 능력을 보여 신성을 증명하라고 재촉합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증거인데도 메시아의 증거를 보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어둡다는 뜻입니다.
🤎 (누가복음 22:54-71) 예수님은 붙잡히시고, 모든 제자들은 도망하고 오직 베드로만이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마당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멀리서 주님을 비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세 번이나 예수님과 같은 도당이라 지적 받았을 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오늘 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셨던 말씀이 생각나고, 예수님의 시선을 바라보게 될 때, 밖에 나가 통곡하고 무너진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였나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 하신 말씀대로 돌이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예수님의 붙잡히신 상황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게 하옵소서.
예수님 사랑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붙잡히심이 끝이 아니고, 거듭 날 수 있는 회복의 시작됨을 알게 하옵소서. 하물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졌으니,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대통령의 '비상 계엄'이 실패해 '내란 수괴'로 구속되었으니, 따르던 무리들, 그들에게 무엇을 더바라겠습니까? 대부분이 도망한 제자들 처럼 돌아서 각자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이것을 절체절명의 기회로 여기고 돌아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속'에서 함께 소리 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의 고난을 장차 올 영광에 견주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소망을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결국 가룟인 유다처럼, 도망한 제자들 처럼 언제나 가장 가까운 이들이,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먼저 등에 칼을 꽂는 이들입니다.
주님, 우리들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 허락하시여 넉넉히 감당하게 하시고, 또한 피할 길을 여시겠다' 하신 말씀을 붙들고, '소망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통곡의 눈물로 회개하고 돌이켜 거듭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무너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되살아나게 하옵시고
하나님 홀로 존귀와 영광 받으실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여호와 샬롬 ~
#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기에 의를 위한 고난에 담대히 동참하게 하소서,
** 파키스탄에서 분리주의자 테러가 증가하면서 정부군과 무장단체 사이에 충돌 우려가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 정치, 사회가 속히 안정되고,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게 하실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중보기도 드립니다.
찬송 : 152장, 귀하신 예수
https://youtu.be/kROAahCVDe0?feature=shared
https://youtu.be/WHAF2z2e6U4?feature=shared